2018/04/01 16:58

생활인의 비평: 유튜브의 시대, 나약한 연대로서의 비평 세계



1. 생활인의 비평: "왜 쓸까?"

돌잡이 때 나는 뭘 집었더라.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도 없다. "연필 아닌가?" 기억을 더듬던 어머니의 결론이었다. 그럴 팔자였을까. 쓰는 미래를 자주 상상했다. 장래희망은 유행 따라 과학자도 CEO도 되었지만 읽고 쓰는 장래만은 희망을 넘어 예감의 일부였다. 지금도 글을 쓰고 있으니 돌잡이의 예감이 썩 틀리진 않았다.

돈을 벌고, 글을 쓴다. 나의 글이 충분한 돈으로 바뀐다면 '글을 써서 돈을 번다'고 썼을 텐데. 돈과 글을 인과 관계로 엮지 못해 긴 시간을 돈으로, 짧은 시간을 글로 바꾸고 있다. 돈과 연필을 양손에 따로 쥐려 애쓴다. 아쉽지는 않다. 재미와 의미와 돈이 근사하게 겹쳐지는 분야를 찾는 건 차라리 마법 같은 일이니까. 이만하면 운이 좋았다. 돈은 애초에 쥐지도 않은 팔자였으니. 블로그를 하다 우연히 지면을 얻었고 더 우연히 돈 벌 길도 구했다. 지면도 직업도 최근에 가진 편이라 대단히 피곤할 겨를도 없었다.

다만 발목을 잡는 물음들은 있다. 굳이 삶을 두 갈래로 쪼개어 살 필요가 있을까. 적막한 흰 화면을 메우는 막막한 시간을 굳이 버텨야만 할까. 지금은 밥벌이의 기술이 먼저 아닐까. 직업윤리를 배반하지 않는 시민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한국 사회에 먼저 필요한 건 대단한 신념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제 몫을 다하는 생활인일 텐데. 하물며 비평이라니. 대중음악이라니.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한 줌인 일에 시간을 쏟겠다니. 물음은 꼬리를 물었고, 덜 쓰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덜 피곤한 삶을 예감하면서.

그렇지만 쓴다. 덜 쓸수록 더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연필을 고른 돌잡이의 예언 때문이다. 돈을 벌 거나 돈을 쓰거나, 스위치를 껐다 켜듯 둘 중 하나만 고르는 것으론 삶이 완성되지 않았다. 화폐 증식의 합리성만으론 살 수 없고 화폐 없이 살 수도 없을 때, 다른 합리성의 체계를 끌어오기 위해 노래를 듣고 글을 썼다. 좋아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해명하려 했다. 가끔 여행으로 사무실을 탈출하듯, 가끔 글로 일상을 이탈해 비평의 세계로 진입했다. 이방인이 되어 다른 세계의 볕을 쬐었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그 빛을 따라 아름답고 선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위해 썼다. 나를 구하기 위해 썼다. 비평가의 소명이나 책임 따위는 나중 일이었다.


2. 비평계: "나는 우리일까?"

이게 어디 나 혼자만의 일일까. 음원 스트리밍 업체가 나눠주는 원고료 약간이 전부인 이 시장에서 다른 직업 없이 버틸 비평가가 몇이나 될까. 그들에게도 아마 일상이, 또 비평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의 비평 세계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비평계를 이룬다고는 장담할 순 없다. 우리가 정말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기는 할까. 같은 세계의 볕을 쬐고 있을까. 나는 우리일까. 아니, 그러고 싶기는 한 걸까. 그러니까 나는 '우리'이길 원하고 있는 걸까.

돌이켜보면 소속감이 늘 좋았다. 학교에 다닐 땐 반과 동아리가 있어 좋았고 이왕이면 반장도 되고 싶었다. 나서거나 자랑하는 게 멋없단 걸 깨달은 뒤에도 '우리'의 기분만은 은밀히 사랑해왔다. 그러나 모든 모임이 우리일 수는 없다는 것도 함께 배웠다. 비평계라는 모임도 그래서 미심쩍었다. 소수의 참가자들마저 웹진 단위로 흩어진 네트워크 다발 몇몇을 세계라고 불러도 되나 싶었다. 현실을 생각할수록 비평계란 말은 꿈처럼 들렸다.

규모가 작으면 어떻고 꿈이면 또 어떤가. 어떤 우리는 작더라도 강하고 꿈을 먹고 자란 우리는 현실마저 바꾼다. 중요한 건 꿈의 내용이다. 비평계의 꿈은 너무 막연해서 너무 거창해 보였다. 기성 비평가의 권위도, 그걸 비판하는 당위도 비평계라는 대단한 꿈을 꿀 때만 가능했다. 그런 꿈은 꾸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겐 거짓말 같았다. 돈 버는 일상에서 잠깐 벗어나 좋은 것들에 대해 쓸 뿐인데. 어쩌면 다들 그런 심정일 텐데. 내 물적 토대와 취향을 덮어둔 채 초월적인 심판자가 된 기분으로 자아를 살찌우고 싶지 않았다. 비평계라는 우리를 피할 때만 솔직한 나일 것 같았다.

피하기만 해서 솔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는 지면이 있고, 함께할 비평가 지인이 여럿 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우리였다. 솔직해지려면 차라리 다른 꿈을 꿔야 했다. 더 담백한 우리를 구체적으로 그려야 했다. 서로의 처지와 취향에 솔직한 우리를. 무거운 말을 걷어내고도 성실한 우리를. 그런 동료와 서로의 빛을 나누는 우정의 세계를. 다행히 가까이에 기꺼이 그럴 동료들이 있다. 이런 우리의 꿈이라면 힘껏 사랑할 수 있다. 구태여 나서 반장 선거에 나갈 필요도 없이.


3. 유튜브의 시대, 나약한 연대로서의 비평: "뭘 어떻게 쓸까?"

그래서 뭘 쓸까. 나에게는 일상 밖 빛이고 우리에겐 우정인 글쓰기로 무엇을 전해야 할까. 소용없는 질문이다. 노래가 이토록 많은데 글의 쓸모가 하나일 리 없다. 우리는 여러 색으로 빛날 때 더 건강하고 요긴하다. 대신 소망할 수 있는 건 내용이 아닌 색깔이다. 나의 어조와 분위기다.

좋아하는 것의 좋은 점에 대해 정확히 해명하고 싶다. 싫어하는 것의 해악이 현저하지 않다면, 싫어하는 것의 절멸 대신 좋아하는 것의 번영에 집중하고 싶다. 기력을 다해 따뜻하고 싶다. 그런 기운으로 쓰고 읽히고 싶다. 물론 비평은 논증적인 평가문이어야 한다. 칭찬 가득한 보도 자료 같을 수는 없다. 작품을 분해해 감각의 이유를 내재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음악적 맥락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정확하고 공정해야 한다. 그러나 좋은 것과 싫은 것의 개수까지 맞춰 다룰 필요는 없다. 노래는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 짧다. 바쁜 생활인에겐 가능한 좋은 걸 권하고 싶다. 내게 필요한 게 그런 것이니까. 만원 지하철에서 간신히 꽂은 이어폰에서만은 가능한 좋은 것만 들렸으면 하니까. 그런 순간을 선물하고 싶으니까.

진짜 어려운 문제는 유튜브다. 유튜브는 인터넷이 닿는 모든 곳의 모든 노래를 남김없이 쌓아 진열한다. 희소하지 않으면 교환 가치가 떨어진다. 값이 내려가는 게 어디 노래뿐일까. 글의 사정은 더 나쁘다. 비평가가 더듬더듬 글로 설득할 때 유튜브는 영상만을 끝없이 추천한다. 사람들은 글이 아닌 추천과 스킵의 무한한 반복으로 취향을 만든다. 나쁜 걸 숙고하자는 글은커녕 좋은 걸 권하는 글조차 쓸모가 별로 없다. 사정이 이렇다면 도대체 뭘 어떻게 써야 할까. 글도 노래도 이토록 무력하다는데.

다행인 사실이 둘 있다. 하나, 글도 노래도 사람과 사회를 바꾸는 일엔 원래 나약했다. 둘, 모든 시작엔 나약한 것들의 연대가 있었다. 그러니 나는 나약한 글로 나약한 노래들을 옹호해볼 생각이다. 추천과 스킵의 회로 속에서 노래들이 빠르게 잊힐 때 글로써 노래의 맛을 재차 설득해볼 생각이다. 생활인의 리듬에 자연스레 올라탈 매력적인 일상의 언어로. 낯선 소리와 말들이 청자에게 전해지도록. 노래들이 덜 잊히도록.

아름다운 노래와의 연대를 약속한다. 자주 할 수 없다면 오랜 연대만이라도 마음을 다해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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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0일
(2018년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진행된 <한 줄도 쓰지 않았어요>에 전시되었습니다.)

2017/08/19 23:23

올해 여름 일기


쓰지 않아도 좋았다. 몇 번이고 달이 차도 기울지 않을 서정이라면. 오늘은 별수 없이 말을 짓는다.

서울은 폭염이거나 장마였다. 물속을 헤집듯 함부로 걸었다. 직선으로 걸었고 가끔은 달렸다. 직선의 정의 속에는 끝의 개념이 없어서 끝의 행운도 행운의 끝도 예감하지 못했다.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던 것 같은데. 달리 더 갖고 싶은 삶도 알지 못해 예감 없이 살았다.

잃을 줄 알았을 때 아버지를 가장 사랑했다. 뻔한 현실로 돌아온 그를 이제 다시 지겨워한다. 가족 노래가 적당히 슬플 때 가족은 미워졌다. 동화를 닮을 수 없을 때 가족은 밉고 슬펐다. 예쁜 작별 대신 서로의 짐으로 남을 때, 새 가족을 위해 옛 가족은 거짓말이 될 때, 포근함이 끈적하게 섞여갈 때, 가족은 밉고 슬픈 거짓말이었다. 가족 노래의 가사를 바꿔 따라 부르는 선량한 내가 좀 끔찍했다.

지난주엔 어머니와 봉은사에 다녀왔다. 가로로 눈을 뜬 불상 앞에선 달리 빌 것이 없어 곁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살피시라 빌었다.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함께 갔던 63빌딩을 봤다. 이번에도 애매한 동색으로만 빛났다. 비슷한 미래를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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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신·루싸이트 토끼, 〈사라진 소녀〉, 미스틱엔터테인먼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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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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